01
첫번째:
잃어버린 ‘이리’시대의 영광
“하이고~ 그때는 시장이 바글바글 했었는디, 사람들이 밟혀가지고 갈 데가 없었어요.”
전북 익산 토박이이자 중앙시장 상인 이승호씨(71세)가 말했다.
익산 창인동 중앙시장은 광복 후인 1947년 개장했다. 이리역(현 익산역)과 가까워 장사가 잘됐다. 이씨는 “1960년대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찼다. 노점상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쓸이꾼도 많았다”고 했다.
이리시(현 익산시)는 허름한 목조 점포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2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상인들을 입주시켰다. 상가건물형 시장인 지금의 중앙시장 건물이다.
“여기 2층 계단에서도 할머니들이 앉아 하루에 콩나물을 여섯 통, 일곱 통씩 팔고 그랬어요. 방앗간, 튀밥집, 순댓국 집이 많았는데 그래서 매웁기도 하고 고소한 냄새도 나고 여기서 뻥, 저기서 뻥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중앙시장 상인 이승호씨(71세)
중앙시장 건물 주변으로 상권이 길게 이어졌다. 인근의 원광여자중학교가 1970년대 후반 이리역 건너 모현동으로 이전하자 상인들은 텅 빈 학교 건물 1~2층을 상가로 개조해 사용했다.
중앙시장 골목에는 옷 가게도 많았다. 양복점으로 유명한 익산의 번화가 ‘영정통’에 갈 수 없는 서민들은 중앙시장의 기성복 가게를 찾았다.
옷 가게를 하는 오진영씨(67세)는 “1980년대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이리 공단의 쌍방울 메리야스 공장이 정말 잘 돌아갔다. 공장 월급 날인 10일만 되면 시장이 공장 아가씨들로 빡빡하게 들어찼다”고 말했다.
쌍방울 공장이 생산라인 절반을 중국 길림성 공장으로 옮기면서 시장을 찾는 손님이 줄었다. 인근 모현동과 영등동에 신시가지가 만들어지면서 구도심 인구도 빠져나갔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익산시내에 대형마트 3곳이 문을 열었다. 중앙시장 일대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긴 침체기를 맞았다.
익산시 구도심(창인·갈산·중앙동) 인구 변화 추이
출처: 전라북도,「주민등록인구통계」
전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방법은 없을까.
익산시청과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중앙시장 주차장에 ‘공공디자인’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공공디자인이란 지역 특성과 주민 편의에 맞춰 공공장소와 공공시설물을 디자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차장 하나 개선한다고 전통시장이 달라질 수 있을까. 앞으로 주차장은 시장 상인 공동체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02
두번째:
3개 시장으로 갈라진 중앙시장
설 연휴를 앞둔 지난 2월4일 익산 중앙시장을 찾았다. 상인들이 펴놓은 좌판을 피해 차를 몰고 일방통행 골목을 지나가는데 오른쪽에 공영주차장 간판이 붙어있었다.
이전에는 주차장 입구 간판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방문객들이 주차장의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새로 바뀐 주차장 입구에는 ‘이리대’라는 간판이 크게 붙어있었다. 익산시의 옛 이름 ‘이리’를 ‘여기에 차를 대라’는 뜻으로 활용한 게 재밌었다.
“깔끔허니 좋아졌네.”
이날 아침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장에 들어가던 손동영씨(84세)가 말했다. 손에는 절반 정도 채워진 마대가 들렸다. 기름을 짜러 왔다고 했다. 그를 따라 중앙시장 2층 기름집으로 올라갔다.
기름집 주인은 “재래시장이 힘들다고는 해도 명절이 되면 손님들이 가게를 좀 찾았는데, 이번에는 설이 코앞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나마 이 집은 2층인데도 장사가 되는 편이다.
기름집 옆 ‘금호통닭’, ‘요골집’ 등은 출입문과 아궁이가 나무판자로 막혀 있었다. 상인들은 간판만 걸린 채 수 년째 비어있는 집들이 많다고 했다.
2층짜리 중앙시장 건물을 따라 만들어진 시장 상권은 남북으로 420m 가량 길게 이어진다. 예전엔 모두 중앙시장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2층 건물만 ‘중앙시장’이라고 부른다. 건물 맞은편 상점들은 ‘매일시장’, 북쪽의 상점들은 ‘서동시장’이 됐다.
중앙시장과 매일시장을 가르는 골목길에는 2008년 아케이드 지붕이 설치됐다. 아케이드 양쪽으로 상점들이 속한 시장이 다르다는 게 이상했다.
중앙시장이 세 개의 시장으로 나뉜 건 전통시장을 지원하겠다며 2005년 시행된 ‘재래시장육성을위한특별법’ 영향이다. 이 법은 전통시장 경계를 명확히 하고 이에 따라 구성된 상인회에 사업 자금을 지원한다.
상가건물형 시장으로 시작한 중앙시장은 해당 건물 안에 입주한 상가들만 인정을 받았다. 건물 밖 상인들은 각각 상인회를 조직하고 별도의 시장이 됐다. 이후 세 시장은 경쟁적으로 지원 자금을 신청하고 각자 시장을 꾸려나갔다.
03
세번째:
이곳엔 특별한 동아리가 있다
하지만 본디 한 몸이었던 서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중앙시장은 가공품과 식당, 매일시장은 의류, 서동시장은 육류, 수산물, 청과물 등이 주를 이룬다. 손님들은 시장에 오면, 아케이드를 따라 걸으면서 다른 두 시장을 방문한다. 상인들도 세 시장 앞 글자를 따 ‘중매서 시장’으로 부르기로 했다.
상인들은 2015년부터 댄스, 난타, 요가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오후 7시30분부터 한 시간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모임을 가졌다.
댄스 동아리 회원인 ‘아현닭집’의 이미정씨(51세)는 “지금은 코로나19로 모임이 취소됐지만 그전에는 매번 모임에 나갔다. 장사도 중요하지만 가서 뭔가를 배운다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서먹했던 시장 상인들과도 친해졌다.
“시장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잘 몰랐어요. 특히 서동시장과는 평소 왕래가 없었거든요. 얘기도 안 하니까 거리가 좀 있잖아요.
이제 모이니까 얘기도 많이 하고, 메신저로도 연락할 수 있게 됐죠.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시장을 위해 이렇게 합시다’하면, 아무도 안 하려고 하잖아요. 서로 알게 되니까 힘이 되고 보탬이 돼요.”
박성아 익산시청 주무관은 “공공디자인과 문화를 접목해서 익산의 구도심에 새로운 공간을 조성해 보려고 했는데 가능성이 보이는 곳이 중앙·매일·서동 시장이었다”고 했다.
“중매서 시장은 상인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이뤄지고 있거든요. 별도의 공간을 조성한다면 상인들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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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는 원래 급한 경사로가 있었다. 시장 상인이나, 어르신들이 짐을 옮기기 수월치 않았다.
공공디자인 사업단은 경사를 완만하게 하고 계단을 만들었다. 주차장과 시장 입구의 높이차를 이용해 무대를 만들고 그 앞에 광장을 조성했다.
서용석 상인회장은 “무대가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 역시 댄스 동아리 회원이다. 예전에도 같은 자리에 간이 무대가 있긴 했지만 앉을 자리도 없고, 주변에 적치된 물건이 많아 무대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공공디자인 사업 완공을 앞둔 지난해 11월 댄스, 난타 동아리 회원들이 새로 만들어진 무대에서 공연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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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이미정씨는 “코로나19 때문에 관객은 없었고, 그냥 주변에서 일하는 상인들만 보셨다. 잘하면 박수 쳐주시고, 틀려도 응원해주시고, 이쁘게 봐주신다”고 했다.
“춤추는 게 얼마나 힘이 나는데요. 코로나19 전에도 야시장을 열면 상인회에서 음악을 트는데, 우리가 연습했던 음악이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러면 다들 우르르 앞으로 나와서 춤추고 그랬어요. 무대가 없을 때도 그랬다니까요.”
새로 조성된 무대 앞 광장에서는 다문화 가족을 위한 바자회도 열릴 예정이었다. 기존 주민들이 빠져나간 지역에 다문화 가족들이 들어오면서 수년 전부터 이들이 시장의 주요 고객이 됐다.
박성아 주무관은 “상인들이 가장 먼저 제안했던 게 다문화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상인들과 ‘월드푸드마켓’이라는 행사를 기획했다. 다문화 가족 구성원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광장에서 판매하는 행사를 기획했는데 코로나19로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고 했다.
04
네번째:
차가 아닌, 사람을 위한 주차장
사업단은 주차장 안에서도 문화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주차장 가운데 긴 사다리꼴 모양의 주차구역은 넓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고, 흰색·회색·진회색 블럭을 주차구역에 깔아 안정감을 높였다. 주차장 한가운데에 무대를 꾸미거나, 천막을 펼칠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실제로 서울의 몇몇 쇼핑단지들은 주차장을 문화행사 공간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익산 공공디자인 사업을 총괄한 박성진 총감독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 저녁 이후나, 중매서 시장 상인들이 야시장을 열때 주차장을 문화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예전의 주차장은 저녁만 되면 어둡고 으슥한 곳이 많았는데, 사업단은 주차장을 에우는 옹벽에 나무 담장을 추가로 설치하고 여기에 LED 조명을 달았다.
낡은 2층 시장 건물과의 경계 부분은 기존의 녹색 철제 담장을 걷어내고 ‘블럭 담장’으로 교체했다.
“당신이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짬뽕라면 맛집 △△분식”
구멍이 뚫린 정육면체 모양의 시멘트 블럭(디자인블럭)을 하나씩 쌓아 담장을 만들었다. 디자인블럭 안에는 빨강, 노랑, 파랑 등 색을 칠한 정육면체 나무 상자가 들어있었다.
상자에는 고양이, 꽃을 그려 넣거나 ‘철오아, 이모 할머니가 사랑한다’ ‘수한아, 군대 잘 갔다 오렴 사랑한다’ 같은 글을 써넣었다. 시장을 방문한 시민들과 상인들이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박성진 총감독은 “주차장 뒤편으로 보이는 시장의 쇠락해가는 모습들이 경관적인 측면에서는 썩 좋지 않았다. 디자인블럭을 사용해서 한번 필터링하고, 허물어져 가는 풍경을 잡아주는 느낌으로 시장의 풍경을 좀 개선하고 유지해가려고 했다.
완전히 차단하거나 막지 않고, 관계를 만들어주면서 어느 정도 열어가면서 풍경을 바꾸자는 의도였다”고 말했다.
블럭 담장에도 조명을 달았다.
박성진 총감독은 “디자인 측면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주차장 동선”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주차할 곳을 찾아 주차장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오면, 막다른 길이었다. 떡집을 운영하는 상인 임모씨(74세)는 “예전 주차장은 안쪽까지 들어와서 되돌아 나오려면 차를 돌려야 했는데, 공간이 마땅치 않아 돌리지는 못하고 주차장 화장실 앞까지 후진으로 나와야 했다. (후진하는 거리가) 십 수 미터 정도 된다”고 말했다.
후진하는 차 때문에 차량들이 엉키기도 하고 보행자도 위험했다.
공공디자인 사업단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동선을 방해하는 유인 정산소를 무인 정산기로 교체했다. 차를 되돌려 나갈 필요 없이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면 바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동선을 개선했다.
좁은 정산소 박스에서 일하던 관리 직원은 무인 정산기 옆 별도의 공간에서, 기계를 쓸 줄 모르는 어르신들을 안내하고 주차장을 관리한다.
주차 폭도 기존 2.3m에서 2.5m로 늘렸다. 그런데도 전체 주차 대수는 69대에서 66대로 불과 3대가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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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에서 만난 전모씨(65세)는 “옛날엔 차 문을 열지도 못할 정도로 좁았는데 널찍하니 좋아졌다. 잘 고쳤다”고 말했다.
차량 동선의 변화
막다른 길에서 후진, 혹은 차를 돌려 나가야만 했던 기존의 동선에서 로터리처럼 순환할 수 있는 구조로 변화했다.
장애인·노약자 전용 주차 구역 재편
협소했던 장애인 전용 주차 구역을 더 넓은 구역으로 이동시키고, 노약자 전용 주차구역을 신설했다.
05
다섯번째:
상인들은 부활을 꿈꾼다.
중앙시장 주차장을 문화주차장으로 개선하는 공공디자인 사업은 2019년 5월부터 시작해 지난해 12월 초 완료됐다. 설문조사, 의견 수렴, 문화행사 기획, 향후 주차장 운영방식 논의 등의 절차만 1년 넘게 걸렸다. 하지만 공사가 진행되자 상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대목인 추석 연휴에 주차장이 공사로 폐쇄됐기 때문이다. 하필 인근의 다른 주차장도 공사 중이었다. 일부 상인들은 “추석 대목에 시장 주차장 두 곳을 동시에 공사하면 손님들이 찾아오겠냐”며 상인회와 사업단, 익산시에 항의했다.
상인회와 사업단은 일일이 상점을 돌아다니며 상인들을 설득했다.
상인 이미정씨는 “공사가 진행된 곳이 우리 상가 앞이라 먼지도 많이 나고 힘들었지만, 시장도 발전하고 사람도 더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참고 기다렸다”며 “주차장이 바뀌고 손님들의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시장 상인들은 공공디자인이 적용된 주차장을 잘 활용할 수 있을까. 변화된 주차장이 중앙시장과 구도심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서용석 상인회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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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동아리 활동도 하고, 선진지 견학도 하면서 서로 공감대가 많이 만들어졌거든요. 무기력하기만 했던 상인들의 생각도 바뀌어 가고 있어요. 서로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가 바뀌고 또 하나가 바뀌고 그렇게 시장이 달라지고 있는거죠.
상인들이 변해야 시장이 변해요. 문화가 있는 주차장을 만드는 공공디자인 사업도 그 과정이죠. 잘 해나가리라고 자신합니다.”
박성진 총감독은 “이번 공공디자인 사업은 시장 주차장이라는 하드웨어의 교체 작업이라기 보다는, 주차장을 이용하는 체계와 내용을 바꾸는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주차장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에 대해 전문가와 문화기획자, 상인회가 같이 모여 토론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매뉴얼’을 만들어 나갔거든요. 시범 사업으로 진행했던 문화행사들도, 향후 이런 행사를 상인회에서 했을 때 어떻게 준비하고 운영해야 하는지 상인회가 배우고 직접 해보자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였어요.”
공공디자인이 적용됐다가 실패한 수많은 지역의 사례들이 있다. 전문가들이 용역으로 들어와 디자인을 바꿔놓으면 반짝 주목을 받다가 이내 시들해지고 원상태로 되돌아간다. 익산의 공공디자인 사업단이 주차장 디자인만큼이나, 주차장 운영 매뉴얼, 문화 행사, 상인들의 자발성 등을 강조하는 건 이런 무형의 요소들이 공공디자인을 지속가능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총감독은 “물리적인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작동하고 유지되는 체계, 시스템을 디자인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익산 사업이 종료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이 작은 주차장에선 뭔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드라이브 스루’ 벼룩시장이 열렸다. 고객들이 익산 소상공인들이 만든 상품을 전화로 주문하면, 주차장 내 드라이브 스루 부스에서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주차장을 방문한 고객들이 시장도 방문하게끔 기획한 것이다.
전통시장의 변화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