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첫번째:
추억의 광장이 지옥이 된 이유
제주도 서귀포 구도심에 있는 ‘일호광장’은 1966년 만들어진 제주도의 첫 광장이다. 제주도 해안선을 따라 도는 ‘일주도로’와, 한라산과 서귀포항을 잇는 ‘중앙로’ 등 제주도 주요도로가 이곳에 모인다.
서귀포에선 길이 다 일호광장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광장으로 연결된 길이 7개에 달한다.
지난 12월18일 광장에서 만난 김수현씨(16세)는 “서귀포 어디에서 버스를 타든 다 일호광장을 지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까지 일호광장엔 오일장이 섰고 서귀포시청과 서귀포경찰서, 시외버스터미널 등이 모여있었다.
27살에 서귀포로 시집을 왔다는 황모 할머니(77세)가 현재 왕복 6차선 도로가 된, 등기소 앞의 ‘일주도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겁나 번화하니 잘됐어. 좁긴 해도 골목골목마다 사람들이 내다 팔려고 좌판을 펴놨거든. 살 게 없는데도 구경가곤 했어.”
서귀포가 고향인 서귀포시청의 임우남 도시디자인팀장도 “일호광장을 볼 때마다 어머니와 함께 다녔던 오일장이 생각난다”고 했다.
“장날에 어머니는 참깨 한되를 보따리에 싸서 어린 저를 데리고 일호광장에 가셨어요. 곡물전에서 참깨를 돈과 바꾸고 나서 선반내 옆에 있는 오일장 함바집에 갔죠. 맹물국수 한 그릇 시켜 제게 주셨어요. 어머니는 제가 남긴 몇 가락 안되는 국수와 국물을 드셨고요.”
일호광장의 과거 사진들
서울의 신촌로터리보다는 조금 작고, 혜화로터리보다는 큰 면적의 일호광장은, 과거 행사 때마다 수 천명의 서귀포 시민들이 모여들었던 공간이다. 1981년 남제주군 서귀읍이 서귀포시로 승격됐을 때도 사람들은 광장을 가득 채웠다.
대통령 후보들의 유세도 이곳에서 있었다. 서귀포 시민들에게 일호광장은 희로애락을 함께한 일상의 광장이었다. 공식명칭은 ‘중앙로터리’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일호광장’으로 부른다.
오일장은 1995년 광장 북쪽의 동홍동으로 옮겨갔다. 시외버스터미널과 서귀포 경찰서는 구도심 서쪽에 조성된 신시가지로 옮겼다. 시청도 둘로 분리돼 1청사는 이곳에, 2청사는 신시가지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다녔던 길은 사라졌고 차로는 넓어졌다. 광장은 차로 채워졌다.
광장은 이제 주민들에게 “교통사고가 많아 운전하기 무서운 곳”, “밤이면 건물 불이 다 꺼지는 황량한 동네”, “버스 환승할 때 잠시 지나가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에게 광장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서귀포시청은 일호광장에 ‘공공디자인’을 적용하기로 했다. 공공디자인이란 지역 특성과 주민 편의에 맞춰 공공장소와 공공시설물들을 디자인 하는 것을 말한다.
2019년 5월부터 2020년 12월까지 ‘공공디자인으로 행복한 공간만들기’ 사업(이하 공공디자인 사업)이 진행됐다. 서귀포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사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호광장 주변 건물주, 세입자 등을 설득하는 일에 1년 가까이 걸렸다.
조남석 총감독은 “교통사고가 많이 나는 광장이라는 오명을 벗고, 예전의 사람 중심의 광장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광장을 시민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이번 사업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교통지옥’이라는 오명
실제로 수십년간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일호광장은 제주지역에서 교통사고 위험이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2017~2019년 서귀포시 교통사고 다발지역 30곳에서 발생한 443건의 사고(단순 접촉 제외)를 분석한 결과, 일호광장 중앙로터리(39건)에서 가장 많은 사고가 발생했다.
일호광장 교통사고 내역
출처: 도로교통안전공단/ 2017년~2019년
- 중상사고
- 부상사고
- 경상사고
일호광장은 “기형적인 도로(한국교통안전공단 권재영 교수)”다. 서문로·중앙로·동문로에서 오는 차량이 일호광장 남쪽에서 만나 회전로터리를 돈다. 회전로터리는 일호광장 북쪽 끝에서 일주도로와 만나 교차로로 변한다.
권 교수는 “서문로·중앙로·동문로와 회전로터리가 만나는 구간에서 차량들의 단순 접촉사고가 잦다면, 일주도로와 회전로터리가 만나는 교차로에선 대형 사고들이 많이 난다”고 말했다.
2019년 하반기부터 착수된 사업은 지난 1년 동안 진행되었다. 일호광장은 어떤 모습으로 새로 태어났을까.
02
두번째:
덜어내고 바꾸자 비로소 보이다
사고의 대부분은 일호광장 회전로터리에서 일주도로로 좌회전해 진입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좌회전이 가능한 1·2차로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차량들이 무리하게 끼어들면서 발생한 사고들이다.
일호광장 회전로터리의 반경은 크지 않은데 차선은 많은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광장 진입로 곳곳에 설치된 도로이정표가 잘못 만들어져 있다는 지적도 많았다.
특히 광장 남쪽의 동문로와 서문로에 설치된 도로이정표는 일호광장을 일반적인 회전로터리로 표시해놨었다.
김지윤 서귀포경찰서 경위는 “동문로와 서문로에서 광장으로 진입하는 차량들은 진입한 차선대로 회전하면 일주도로로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터리 북쪽에 다다라서야 차선을 1·2차로로 옮겼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공공디자인 사업단은 도로이정표부터 바꾸기로 했다. ‘회전로터리’가 아닌 ‘회전로터리+교차로’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기로 했다.
하지만 제주경찰은 전국적으로 쓰이는 회전로터리 이정표를 크게 변형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이정표 디자인이 서너번 퇴짜를 맞았다. 마지막 5번째 수정안이 통과됐다.
일반 회전 로터리에서 → 회전로터리+교차로의 구조로
- 서문로
- 동문로
- 변경 전
- 변경 후
※과거 표지판 출처: 네이버 로드뷰
김 경위는 “새로 바뀐 도로이정표가 실제 도로와 상당부분 일치하게 되면서 운전자들이 보다 안전운전을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묵은 숙제도 해결했다.
그동안 일호광장 동문로 부근에서 우회전한 차량들이 길을 건너려는 보행자를 보지 못하고 사고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높이 1m 배전반이 횡단보도 바로 옆에 설치돼 보행자를 가렸기 때문이다.
박우성씨(25세)도 어렸을 적 이곳에서 사고가 크게 날 뻔 했다.
“키가 작으니까 배전함이 절 가렸던 거예요. 운전자가 횡단보도 건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우회전해서 그대로 지나가려다가 저를 칠 뻔 했어요. 그후론 이 길은 눈길도 안주고 돌아서 다녀요.”
사업단은 한국전력과 수차례 협의해 배전함을 4m 뒤로 물렸다.
전국체전, 올림픽, 월드컵 등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세웠던 조형물들도 문제였다. 운전자 시선을 분산시키고, 보행자 공간을 차지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업단은 일호광장 곳곳에 세워져 있던 16개의 조형물을 뽑아냈다.
하지만 공공디자인으로 광장의 교통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란 난망한 일이다. 이날도 회전로터리를 도는 차량과 진입하는 차량 사이에 접촉사고가 나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여전히 회전로터리 북쪽에서 차선을 어기고 일주도로로 좌회전 하는 차량도 눈에 띄었다.
총감독은 “서귀포 도로와 교통 시스템 전반을 손대지 못하는 상황에서 디자인 만으로 광장의 사고를 줄이는 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며 “다만 큰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광장의 일부 디자인을 개선하면 좀더 안전하고 운전자 친화적인 도로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오는 4월 일주도로의 제한속도가 시속 60km에서 50km로 줄어들면, 이번 사업과 맞물려 일호광장 내 사고 발생률이 낮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03
세번째:
비가오고 눈이와도 쉬어가도록
서측 버스정류장은 일호광장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다. 빵집, 병원, 약국이 모여있다.
이날 고등학교 원서 접수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는 김수현씨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귀포 모든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다 이곳에 와요. 그렇다보니 친구들하고 약속을 잡을 때도 ‘일호광장 파리바게뜨에서 보자’고 해요. 다들 버스를 타면 여기로 오니까요”
빵집 ‘파리바게뜨’가 들어선 3층 건물은 일호광장을 수십년간 지킨 ‘터줏대감’이다. 40년 전 시승격 기념행사 때만해도 신문사, 농협, 병원 등이 입주한 최신식 건물로, 외벽엔 ‘경축 서귀포시 승격’ 현수막이 내걸렸다. 당시 이 건물 옥상까지 올라가 행사를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 있던 황씨 할머니는 “일하러 촌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저기 홈플러스 있는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여기서 내렸어. 노인들은 버스가 공짜니까, 여기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가지”
겨울인데도 버스정류장엔 12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절반이 70대 이상으로 보였다. 3명은 지팡이를 들었다.
서귀포시는 2018년 기준 전체 인구 대비 노인 비율이 17.87%(3만2394명)에 달한다. 전국(14.76%)과 제주시(13.13%) 수치를 웃돈다.
서귀포시에 따르면, 2019년 2월 기준 버스 노선 49개가 일호광장을 지난다. 배차 간격이 넓어 평균 대기시간은 53분에 이른다.
“겨울이니까 그나마 이정도지. 여름엔 앉아 있을 자리조차 없어. 하도 더우니까 시에서 버스정류장에 에어컨까지 설치했어. 근데 사람이 많으면 에어컨도 소용없어. 내가 맨날 ‘밖에 그늘이라도 좀 있으면 그늘 밑에 가 좀 쉴텐데’ 그런 소리를 하고 다녔다니깐.”
어르신들의 의견도 공공디자인 사업에 반영됐다. 사업단은 버스정류장 부근에 쉼터 ‘파고라’를 설치했다.
여름이 되면 송악, 으아리 같은 덩굴이 파고라의 나무기둥을 타고 지붕을 덮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 것으로 보인다. 황씨가 “잘 만들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공공디자인 사업 전 광장에는 야자수만 수십그루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이국적인 풍경을 조성하려고 제주 곳곳에 심은 미국 원산의 워싱턴 야자나무다. 16~20m 높이로 길게 자랐다. 키는 큰데 잎이 적어 그늘을 전혀 만들지 못했다.
서측 버스정류장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파리바게뜨’ 건물 앞 보도에는 제주어를 새겼다.
‘오젠 하난 폭삭 속았수다(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허썰 쉬엇당갑서예(조금 쉬었다 가세요)’ 등 제주의 젊은 세대조차 잘 쓰지 않는 인삿말을 담았다.
유네스코는 2010년 제주어를 아주 심각하게 소멸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로 등재했다. 제주어를 기억하는 일은 이제 제주 사람에게도 과제가 됐다.
“제주 인삿말을 바닥에 새겨서 사람들이 좀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어요. ‘이게 서귀포구나’ 느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둔 거죠.”
04
네번째:
돌아온 광장
일호광장은 다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김태일 제주대 교수는 “사람들이 찾는 공간은 문화적인, 역사적인 요소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곳인데, 그동안 일호광장은 그런 공간의 매력을 도시계획에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공간 속에 시간이 축적되거든요. 모습이 급격하게 바뀌지 않도록 도시를 관리하면서 끊긴 옛 길들을 살리고, 동시에 서귀포의 풍경을 가리지 않는 저밀도 개발을 해야 합니다.”
사업을 진행한 조남석 총감독도 “제주도와 서귀포만이 지니고 있는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사람이 모이는 광장’의 첫 발은 뗀 셈이다.
그는 “일호광장을 서귀포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일에 공공디자인 사업이 마중물이 됐다. 앞으로 ‘도시숲 조성 사업’ ‘공원 도시 만들기 사업’ 등을 관련 프로젝트를 이어나가 사람들이 머무는 광장으로 변화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공공디자인 사업을 주관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단순히 시설을 개선하는 사업이 아니라, 공공디자인을 통해 해당 지역의 고유성과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들이 이뤄졌다. 지역 사회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주민들은 각자가 느낀 일상의 불편들을 찾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공공성이 확보되고 삶의 질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한번의 사업으로 단숨에 일호광장의 모든 문제점이 해결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광장을 다시 주민들의 품으로 되돌려 주려는 노력과 관심이 이어진다면 일호광장의 명성을 언젠가 되찾아 올 수 있지 않을까.
서귀포 최초의 광장, '일호'의 변신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