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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는 다도해의 관문이다.

수많은 섬들이 부표처럼 떠 있다.

완도읍 부두에는 예전부터 이들 섬을 잇는 배가 오갔다. 어선들도 많았다.

부두가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비석거리’ 마을이 있다.

부둣가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달동네 마을이다.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을 주민 상당수가 세상을 떠났다.

젊은 사람들은 마을을 등졌다.

폐가만 늘었다. 황량하고 적막했다.

그런 비석거리가 최근 변화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활기찼던 마을을 되찾겠다며

고령의 주민들이 나선 것이다.

완도 구도심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비석거리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공행공 완도 용암리편
공행공 완도 비석거리편
지붕패턴

01

첫번째:

벼랑 위 비석마을

재희씨의 이야기

“미역공장을 댕기려고 완도로 왔어요.

나도 처음에는 광주 살았어요. 여가 벌어먹기 좋다고 해서 와가지고 사는 것이 지금 이러고 사요. 산동네고 질(길) 은 나빠도 바닷가가 가깝소. 배가 들어오면 뭔 배가 들어오는지 (우리 집에서도) 알 정도거든.

인터뷰 내용 중 핵심 메세지

“미역공장 나가서 벌고, 야간작업도 하고. 날 새도록 일한 뒤엔 구루마를 끄는 일도 했어요. 구루마를 끌면 잠이 안 옹게. 그렇게 여기가 돈벌이가 좋았어요.

동네는 나빠도 (세 들어 사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집세도 비싸고 방이 나오면 얻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 막내를 여서 와서 낳응 게 48년 전의 일이네.”

과거 용암마을 비석거리 풍경

언덕위 용암리 전경(공공디자인 적용 전 모습)

최순희씨(76세)는 스물여덟 살에 전남 완도 용암리에 왔다. 바다와 맞닿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동네였다.

말이 좋아 ‘언덕’이지, ‘벼랑’ 위에 산다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마을 전체가 가파른 암반 위에 놓여 있었다.

완도에서는 용암리라는 공식 명칭보다 ‘비석거리’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비석이 많이 발견돼서 비석거리라고 한다는 얘기도 있고, 이곳 바위로 비석을 만들다보니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완도의 대표적인 달동네다.

과거 용암마을 비석거리 풍경

1994년 촬영된 완도읍 전경. 용암리는 해안가 절벽 위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출처: 경향DB

언덕 위 주민들은 해안을 따라 400m 길이로 길게 마을을 이루었는데, 절반으로 나눠 마을 서쪽 아래는 바다였고, 동쪽 밑에는 부두가 있었다. 부두 주변으로 미역공장, 양조장, 방앗간 등이 모여 있었다.

최씨는 미역공장에서 못 하나 들고 하루 종일 일했다고 했다. 미역에 못을 찔러 넣고 쭉 찢어 줄기와 이파리를 나누는 일이었다.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수작업으로 손질된 미역은 일본으로 수출됐다. 미역 공장도 여럿이었다.

1970년 3월 촬영된 완도 미역의 검사 관경

1970년 3월 촬영된 완도 미역의 검사 관경. 제공: 완도군청

“그땐 완도 사람 전체가 다 (미역공장에) 다녔어요. 돈벌이가 좋으니께 완도에선 강아지가 1000원짜리 물고 다닌다는 말도 있었어요.”

김 양식이 많던 1960년대 완도 강아지가 물고 다녔다던 ‘500원 짜리’는, 미역 양식 시대에 ‘1000원 짜리’가 됐다. 지금은 전복이 김과 미역을 제치고 완도 ‘특산물’이 됐다.

전남 해남 출신 주이규씨(74세)는 젊었을 적 비석거리 앞 부두에서 일했다.

인터뷰 내용 중 핵심 메세지

“리어카 갖고 선창에서 짐도 운반해주고 조금씩 돈 벌고, 항운 노조에서 10년 넘게 하다가, 화물차 운전하기 시작했어요. 완도에서 인제 미역, 김, 멸치 그걸 싣고 부산도 가고, 서울도 가고, 전국적으로 다 돌려다니죠.

돈벌이는 된디 고생도 되고 모아진 거이 없어요. 몸이 아파붕게 지금은 못 하고 있죠.”

최씨나 주씨처럼 외지에서 온 젊은이들을 품어준 곳이 비석거리였다. 이제는 다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됐다.

마을엔 집이 80여채가 있는데 실제로 사람이 사는 집은 절반 정도란다. 대부분 노인 1인 가구다. 나머지 절반은 인근 해남·광주 등지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는 어르신들의 집, 또는 소유권이 이미 2세들에게 넘어간 폐가들이다.

폐가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산다.

완도 비석거리에서 만난 길 고양이들 완도 비석거리에서 만난 길 고양이들

완도 비석거리에서 만난 길 고양이들

마을 어르신들은 “우리 마을은 고양이와 같이 살아. 먹이도 겁나 줘 불고, 긍게 우리랑 겸상을 한다고 보믄 돼야”라며 농을 친다.

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길가에 내놓은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고양이들이 물어뜯는 바람에 냄새가 심하게 나고, 벌레가 꼬이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02

두번째

이장이 된 내천꼬랑의 막내딸

옆 마을 내천꼬랑(완도읍 서성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광주로 나가 살던 손순옥씨(60세)가 비석거리에 터를 잡으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손씨의 어머니는 50년 전 완도와 신지도를 연결해주는 배의 선주였다. 비석거리 주민 중에 그 선박회사의 직원으로 일하는 이들이 많았다.

취재기자와 만난 손순옥 이장 취재기자와 만난 손순옥 이장

용암리의 이장 손순옥씨가 취재기자를 만나 대화하고 있다.

옛 사장을 ‘자상하셨던 분’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셨던 분’으로 기억하는 주민들은 옛 사장의 막내딸 순옥씨가 2019년 이곳으로 오자 “모전여전 아니겠냐”며 덜컥 이장을 맡겼다.

손 이장은 고양이가 물어뜯은 쓰레기와 악취로 골머리를 앓던 마을에 쓰레기 집하장을 설치하고, 아파트 단지 등에 많이 보급된 ‘음식물 쓰레기 종량 기계’를 들여놨다.

집하장을 관리하는 마을 주민 6명은 완도군청의 ‘어르신 일자리’ 사업과 연계돼 일당을 받게 됐다. 주이규씨는 “마을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여성 이장님 덕분”이라고 했다.

이장은 마을을 활기차게 바꾸고, 아름답게 꾸미겠다며 다음 계획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석거리는 절벽 위에 모여사는 마을인데 추락 사고를 막아주는 난간은 성인 허리 정도 높이로 낮고, 부실해 위험했다.

낡은 난간 낡은 난간

밤에는 너무 어두워서 돌아다니기도 힘들었다. 어르신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과제였다. 주민들은 예전처럼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활기찬 마을이 되길 꿈꿨다.

이장과 주민들은 완도군청,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함께 비석거리에 ‘공공디자인’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공공디자인이란 지역 특성과 주민 편의에 맞춰 공공장소와 공공시설물을 설계하는 공공사업을 말한다. 관이 주도하는 도시재생사업과 달리, 지역을 가장 잘 아는 주민이 지역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업에 적극 개입한다는 특징이 있다.

완도지도

비석거리에 공공디자인 사업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다. ‘완도의 달동네’ 비석거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03

세번째

마을회관 옥상에선 완도 앞바다와 작은 섬 ‘주도’가 보인다

지난 5월10일 전남 완도를 찾았다.

비석거리 아랫마을에서 비석거리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길고 가팔랐다. 높이가 10~20m 정도 돼 보였다.

비석거리에 오르니 주택 벽면은 모두 아이보리색으로 통일돼 있었고, 각각의 지붕마다 노랑, 살구, 주황 등의 색을 입혔다. 마을이 햇살을 머금은 것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용암마을 비석거리 풍경

외벽과 지붕의 색채를 비슷한 톤으로 정비를 했는데도 어색하거나 촌스럽지 않았다. 다만 비석거리 주택 80여 채 중 길가(주도길)에 있는 30여 채에만 적용됐다.

공공디자인 사업을 총괄한 김용준 총감독은 “일단 길가에 있는 주택들에 대해서만 색채 정비를 했다. 마을 이미지가 이렇게 변화하니 마을 안쪽에 사는 주민들도 호응하고 있다.

향후 마을 안쪽에 있는 50여 채까지 색채 정비가 이뤄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색체 정비가 이뤄진 마을의 건물들 색체 정비가 이뤄진 마을의 건물들 색체 정비가 이뤄진 마을의 건물들

이날은 마을회관의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날 오전 내내 날카로운 금속 파이프 자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마을을 울렸다. 지나가던 주민이 말했다.

“다 마을 잘 되자고 하는 건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

원래 비석거리에는 마을회관이 없었다. 그동안 주민들은 비좁은 경로당과 부녀회 사무실 등에서 마을회의를 벌였다. 사업팀은 수년간 방치됐던 폐가를 매입한 뒤, 2층짜리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 중앙의 핸들을 잡고 좌우로 이동하며 좌우 사진을 비교해보세요

(전)폐가가 있었던 현 마을회관의 터 / 출처: 네이버 거리뷰 (후)공사가 완료된 마을회관

주민들은 마을회관 한쪽에 마을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주민들을 상대로 바리스타 강의도 열고, 청년 일자리와 어르신 일자리도 만들 계획이다. 이장은 완도 특산물인 전복을 이용해 빵을 만들어 팔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공사 중인 마을회관 옥상 루프탑에 올라갔다. 완도 앞바다와 작은 섬 ‘주도’, 아랫마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랫마을의 일부는 바다였는데 1980년대 간척 사업을 벌이면서 모두 육지가 됐다.

간척 사업 전 용암리 간척 사업 이후 용암리

간척 사업이 시행되기 전인 1948년 용암리 비석거리의 항공사진과 간척 사업 이후인 현재 용암리 비석거리의 항공사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루프탑에는 하얀 그늘막이 설치돼 있었다.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최씨가 “마을회관 완성되면 꼭 한번 와서 보시라. 얼마나 전망이 좋을까. 우리는 카페 잘 되게 하자는 생각만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루프탑에서 커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최씨 인터뷰는 마을회관 옆 이장네 집에서 진행했는데 최씨가 거실에 있는 그리스 산토리니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마을도 저렇게 안 되겠나. 못 될 이유가 없지.”

04

네번째

나무판에 새긴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

재희씨의 이야기
비석거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새겨진 나무판

마을회관 테라스에는 크고 작은 나무판 30여개가 걸려있었다. 나무판 마다 글귀가 ‘비석’ 마냥 새겨져 있었다.

공공디자인 사업팀과 완도군청이 비석거리 주민 수십명을 인터뷰하고 ‘비석거리, 행복한 웃음이 새겨진 우리동네’라는 인터뷰집으로 펴냈다. 일부를 테라스 나무판에도 담았다. 행복했던 기억과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비석거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새겨진 나무판 비석거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새겨진 나무판 비석거리 주민들의 이야기가 새겨진 나무판

“여기서 바로 바닷물로 뛰어들어 수영도 하고 했응께. 주도로 헤엄쳐 가기도 했제. 옛날에는 엄청 멀었는디.”

“화물선 탈 때는 멀리 가니까 닷새나 일주일이 지나야 완도로 돌아오곤 했제. 집에 갈 때는 가끔 라면도 사 가고 사과도 사 가곤 했제. 글믄 애기들이 입이 함박만 해져 갖고 ‘아부지!’하고 엄청 반긴단 말이오. 우리 막둥이 놈은 라면을 글케 좋아해갖고 라면만 사가믄 막 다리를 안고 목을 감싸고 겁나 좋아했는디.”

“간척지를 만들어서 지금 완도는 시끌벅적한 도시가 돼버린 것 같지라이. 여그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 같은디. 저기는 언제 저렇게 변해부렀는가 모르겄소. 젊어서부터 여그서 이렇게나 오래 살았는디도 가끔 보믄 저 아래가 겁나 낯설단 말이오.”

마을에 이야기를 입히는 ‘스토리텔링’은 지역 홍보와 관광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인터뷰 내용 중 핵심 메세지

기획 영상 전체 보러가기

총감독은 “마을 주민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을에 대한 애착도 더해지고, 공공디자인 사업에 적극 참여하려는 욕구도 생기고 관심을 갖게 된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주민들만 알고 있는 마을의 이야기를 발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업 초기에 주민들은 ‘비석거리’라는 이름을 드러내는데 반대했다.

완도의 달동네로 굳어진 ‘비석거리’라는 명칭을 굳이 쓸 필요가 있냐고 했다.

하지만 ‘스토리텔링’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비석거리’ 명칭을 그대로 쓰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비석거리 이름이 새겨진 모습 비석거리 이름이 새겨진 모습

사업 이후 마을 곳곳에 새겨진 ‘비석거리’ 명칭

손 이장은 “이제는 주민들이 비석거리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신 듯 하다”고 말했다.

05

다섯 번째

울력으로 같이 만든 마을 길

재희씨의 이야기

마을 경로당 앞에는 커다란 팽나무가 하나 있다.

나무도 높고 품도 넓다. 성인 남자 세 명이 두 팔을 벌려 겨우 안을 정도로 큰 나무다. 사람들은 팽나무 아래 평상을 두고 쉬었다.

“미역공장에 감스로, 갔다옴스로 또 누웠다 가고. 평상이 있어 놓응께. 또 낮에 점심 먹으러 와서 시간이 좀 있으믄 ‘아이고 여기 좀 앉았다 가자’ ‘우리 명당자리다’ 그라고 살았어요.

흐흐흐. 애기들 여기서 많이 놀았제. 시원하께. 우리들도 애들한테 ‘팽나무에서 놀아라, 바닷가에는 가지 마라’ 그랬죠. 지금 쉰 한살짜리 큰애 동갑이 그때 (마을에) 열 다섯명쯤 됐어요. 호랑이띠 마흔 여덟살짜리가 열 세명 됐었고. 아니, 그것보다 더 됐구나. 엄청 많았어 애기들이. 보통 네다섯씩 낳았으니까.”

주민 최순희의 말이다.

사진 중앙의 핸들을 잡고 좌우로 이동하며 좌우 사진을 비교해보세요

(전)쉼터공간이 있기 전 경로당 앞 팽나무 (후)쉼터공간이 조성된 모습

사업팀은 팽나무 주변에 ‘데크’를 깔았다. 나무 그늘에 맞춰 길이 16m, 너비 최대 3m로 무대처럼 조성했다. 주이규씨는 한여름이 돼도 걱정이 안된다고 했다.

“날이 더울 때 팽나무 밑에 시원하니 앉아봐라. 에어컨이 필요없다.”

팽나무쉼터

길가에 성인 어깨 정도 높이의 담장이 새로 설치됐다. 이전 담장은 높이가 어른 허리 정도로 낮거나, 철망으로 된 허술한 담장이었다. 새로 설치된 담장 위에 빨랫줄을 걸고 옷을 널어둔 집도 있었다.

비석거리는 어떻게 안전해졌을까

사진 중앙의 핸들을 잡고 좌우로 이동하며 좌우 사진을 비교해보세요

기존의 난간을 허물고 새로운 난간을 설치한 모습

기존의 위험했던 간이 난간을 허물고 새로운 난간을 설치한 모습

난간을 새로 설치하고 경관사업까지 마쳐 깔끔해진 비석거리 모습

마을 서쪽 끝에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40여년 전 주민들이 직접 만든 길이라고 했다.

“우리 여자들은 애기가 있응께 애기 업고 세숫대야 이고 돌멩이 하나 나르고, 흙 하나 나르고. 어른들은 인자 삽이나 괭이로 질(길)을 조금씩 넓히면서 ‘흙 더 캐라, 더 캐라’ 그러고.

학생들도 학교 못가게 하고 울력(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하는 일)허고 그랬어요. 지금도 걔네들이 그런 말을 해요. ‘아줌마, 우리도 세숫대야 이고 울력했어요’라고. 흐흐흐.” 최순희씨의 말에는 ‘마을을 만든 건 우리’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용암마을 전경

사업팀은 그 길을 새로 포장했다. 마을로 오르는 길 중간에 쉼터를 조성하고, 난간마다 조명을 달았다.

용암마을 전경

40여년 전 주민들이 직접 괭이를 들고 낸 길의 현재 모습. 사업팀은 이 길을 새로이 포장하고 높은 난간과 조명을 달아 안전을 강화했다.

총감독은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편의성이었다. 밤길이 어두워 어르신들이 다니기 위험하고 불편했다. 조명을 설치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말했다.

06

여섯 번째

‘빙그레’ 웃음이 끊이지 않는 마을

완도(莞島)의 ‘완’은 ‘빙그레 웃는다’는 뜻이 있다.

비석거리 주민들이 울력으로 만든 길 아래에도 ‘빙그레 공원’이 있다. 주민들은 일은 고됐지만, 이웃이 있고 아이들이 많아 웃음이 끊이지 않는 마을이었다고 했다. 최순희씨가 말했다.

용암마을 전경

용암마을 전경

용암리 주민 최순희씨(76세)와 주이규씨(74세)

“이렇게 산동네래도 참 단체가 좋았어요. 잉? 단체가 뭐냐고? 말하자믄 ‘의리가 좋았다’고. 동네에서 초상이 나믄 우리가 5일 간 일을 안 가. 그 집 가서 도와주고 그랬어요. 결혼식을 하고 그라믄 애기들은 메칠씩 같이 놀고 그랬어요.

근데 그분들은 다 돌아가셔 불고, 우리 멧이 안 남았어요. 지금은 사람 이 빠진 거 같애. 집이 하나 있고, 저기 하나 있고 여거는 빈집이고 이렁께. 옛날에는 사람이 빈틈이 없이 살았어라.

빈 집들이 없어져 불고 그 자리에 새 집이 들어와 살고 그랬으면 좋겠지요. (지금은) 이 동네가 그 북적이던 애기들이 (거의) 없어. 멧집이 있긴 있소마는…. 지금은 우리 뒷골목에 ○○이네 애기들. 그 손주들이 지나가면 ‘오메, 내 강아지들 내려가네’ 그 소리가 나와요잉. 그럼 (애들이) ‘강아지 아닌데요. 할머니’ 그라요. 흐흐흐.”

비석거리 공공디자인 사업은 2021년 5월 모두 마무리됐다. 하지만 새로운 재생사업들이 비석거리 일대에서 추진되고 있다. 비석거리로 올라가는 언덕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비석거리를 포함한 원도심 일대(완도읍 용암·주도·서성·중앙리)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됐다. 공공디자인 사업이 ‘마중물’이 된 셈이다.

인터뷰 내용 중 핵심 메세지

손순옥 이장은 “이번 공공디자인 사업으로 어르신들 일자리가 더 늘었고, 무엇보다 주민들이 마을에 대한 자부심,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다들 주인의식을 갖고 마을을 돌보기 시작했다”며 “앞으로 마을의 폐가를 줄여가고 청년들을 끌어들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