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정보
기획특집
- 작성일:
- 2026-05-04
- 작성자:
- 박은영
- 조회수:
- 1103
[기획] 가까워진 도시, 연결되는 세대
공공디자인 소식지 제66호(202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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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15분 도시, 근접성을 회복하는 도시의 새로운 지형
1933년 아테네 헌장이 제시한 근대주의 도시계획의 기능 분리 원칙은 도시를 자동차 중심의 이동으로 연결된 거대한 퍼즐처럼 작동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자동차 의존이 심화되었고, 이는 탄소 배출 증가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15분 도시(La Ville du Quart d’Heure)’다. IAE 파리 소르본 비즈니스 스쿨(IAE Paris – Université Paris 1 Panthéon-Sorbonne)의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가 2016년 정립한 이 개념은 주거와 일, 소비와 돌봄, 교육과 여가 등 일상의 필수 기능을 집에서 15분 이내에 누릴 수 있도록 도시를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이후 이 개념은 전 세계 50여 개 도시로 확산되었으며, 멕시코시티의 유토피아스(Utopias), 미국 포틀랜드의 완전한 동네(Complete Neighbourhoods), 스코틀랜드와 호주 멜버른의 ‘20분 동네’ 등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변화가 시작됐다. 2021년 부산이 최초로 ‘15분 도시’를 공식 채택했고, 제주는 시범지구 조성을 추진 중이다. 서울은 이를 ‘보행일상권’ 개념으로 번안해 『2040 서울도시기본계획』에 반영했다. 초고령화와 지방 소멸, 청년층의 극단적인 직주 분리라는 과제 속에서 15분 도시가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는 지금, IAE 파리 소르본 비즈니스 스쿨 산하 기업가정신·지역·혁신 연구소(이하 Chaire ETI)와 이곳에서 활동 중인 도시 디자이너 한승훈에게 이 개념이 우리의 일상과 도시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지 물었다.
하루를 기준으로 다시 읽는 도시의 삶
15분 도시가 제시하는 해법은 관점의 전환에서 출발한다. 도시를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바라볼 때, 주거·업무·교육·공급·돌봄·여가라는 여섯 가지 기본적 사회 기능이 일상 이동 범위 안에서 얼마나 접근 가능한지가 도시 경험의 질을 좌우한다. 이는 단순한 기능 재배치가 아니라 시민의 하루와 생활 반경을 기준으로 도시를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시민의 일상을 먼저 이해하고, 그에 맞는 공간을 설계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15분 도시의 방법론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의 완성된 모델을 제시하기보다 다양한 조건 속에서 지속적으로 조정하고 검증해 나가는 프레임워크라는 데 있다.

주거·업무·교육·공급·돌봄·여가 여섯 가지 사회 기능을 기준으로 사회적 삶의 질을 평가하고 도시와 지역 개발을 설계하는 15분 도시의 개념도. 이미지 제공: Chaire ETI
15분 도시는 세 가지 핵심 접근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크로노-어바니즘(Chrono-Urbanism, 시간-도시주의)’이다. 공간을 기능별로 분할하던 전통적 도시계획과 달리, 시민의 일상 리듬에 맞춰 공간을 재조직하는 개념이다. 긴 통근 시간과 비효율적인 공간 사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결과, 그 부담은 운전이 어려운 어린이와 고령자 등에게 더 크게 전가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15분 도시는 ‘시간의 불평등’을 도시 공간의 재설계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둘째는 ‘크로노토피아(Chronotopia, 시간-공간의 중첩성)’다. 하나의 공간이 시간대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하는 원리다. 예를 들어 마을 광장이 아침에는 시장, 낮에는 주차장, 저녁에는 축제 공간으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셋째는 ‘토포필리아(Topophilia, 장소 애착)’다. 도시가 시민에게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소가 될 때 지속 가능성이 확보된다는 관점이다. 이때 근접성은 수단이며, 장소에 대한 애착은 궁극적인 목표가 된다. 이러한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실무적 방향은 근접성, 다양성, 밀도, 디지털화로 정리된다. 핵심은 각 도시의 인구, 기후, 지형, 문화적 조건에 맞게 근접성의 구조를 설계하는 데 있다. 특히 인구가 분산된 지방 도시에서는 ‘30분 영토’와 같은 확장된 개념이 적용될 수 있다.

파리 도심 곳곳에 마련된 녹지에서 휴식하고 있는 시민들. 멀리 도시 외곽으로 나가지 않고도 푸르른 자연을 누릴 수 있다. 사진 제공: ⓒSeunghoon HAN / Chaire ETI

광장에서 축제와 이벤트를 즐기는 파리 시민들. 하나의 공간이 시간대에 따라 여러 가지 쓰임으로 활용될 때 도시는 더욱 활성화된다. 사진 제공: ⓒSeunghoon HAN / Chaire ETI
도시민의 일상 측정과 경험 수집
15분 도시의 구현은 객관적 측정에서 출발해 시민 참여를 거쳐 지속적 정책과 거버넌스로 이어지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활용되는 것이 정량·정성 분석의 병행이다. 특정 서비스가 실제로 몇 분 안에 도달 가능한지, 해당 지역에 어떤 서비스가 존재하고 무엇이 부족한지를 데이터로 분석하는 동시에 시민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불편을 느끼며 그 장소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질적으로 파악한다.
정량 분석의 핵심 도구는 아이소크론(Isochrone, 등시선도)* 분석이다. 시민의 일상 거점에서 여섯 가지 필수 기능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지도 위에 시각화해 어느 지역이 어떤 기능에 취약한지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수량 체크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방식으로 보행성, 안전, 개인의 이동 제약과 같은 조건을 반영한다. 같은 거리라도 누가 어떤 조건에서 이동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나타나는 경험을 구분해 분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정을 종합해 Chaire ETI가 제안한 지표가 ‘사회적 삶의 질 지수(High Quality of Societal Life, HQSL)’다.
정성 분석 도구로는 Chaire ETI에서 개발한 참여형 ‘근접성 워크숍(Proximities Fresk)’이 활용된다. 시민과 함께 일상의 불편과 단절, 필요를 이야기로 풀어내는 과정은 데이터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활의 맥락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도시는 추상적 계획의 대상이 아니라 시민의 하루와 경험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조정되는 구조가 된다. 이동 거리가 짧아지고 지역 내 활동이 늘어나면서 공공공간의 기능과 의미가 달라지고 일상은 보다 밀도 있고 관계 중심적으로 재구성된다.
*아이소크론: 특정 지점에서 동일한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선으로 나타낸 지도. 시간적 접근성을 공간적으로 시각화하는 데 활용된다.

인구 밀도 기반의 아이소크론 지도(좌)는 색이 짙을수록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임을 나타낸다. 녹지·시설 접근성 기반 아이소크론 지도(우)는 녹색 원의 크기와 밀도로 접근성의 수준을 표현했다. 이미지 제공: Chaire ETI

근접성 워크숍의 운영 구성. 참여자들이 직접 자신의 생활권을 진단하고 15분 도시의 개념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미지 제공: Chaire ETI

근접성 워크숍 진행 장면. 테이블마다 카드와 활동 보드를 펼쳐놓고 소그룹 토론을 이어가는 참가자들의 모습. 사진 제공: ⓒSeunghoon HAN / Chaire ETI
자동차에서 보행 중심으로 전환 중인 파리
파리는 15분 도시 개념이 가장 가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현장이다. 근접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변화 정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특히 자동차 중심의 거리에서 보행 중심의 전환을 통해 남녀노소 모두가 안전하게 누릴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일상에서 가장 큰 시각적·경험적 변화를 가져온 정책은 ‘학교 가는 길(Rues aux écoles)’이다. 학교 주변의 노상 주차 공간으로 쓰이던 차량 중심 도로를 공원화하는 프로젝트로, 단순한 교통 통제가 아닌 통합적인 접근법을 지향한다. 변화는 일상의 작은 풍경에서 드러난다. 부모들은 차로 아이를 데려다 주는 대신 함께 걸어 등하교를 한다. 덕분에 등하교길에는 차량의 소음과 매연이 사라지고 이웃들이 얼굴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늘어난다. 하루의 출발이 도보와 자전거로 바뀌고 차 없는 일상으로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효과는 환경 변화로도 나타났다. 파리시의 조사에 따르면, 4구 생메리 초등학교 인근에서는 차량 통행을 줄인 뒤 2년(2021~2023) 만에 외부 대기의 이산화질소 농도가 25% 감소한 것으로 측정됐다. 이와 연계된 ‘파리 오아시스(Paris Oasis)’는 공립학교 운동장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녹지를 심어 수업 외 시간에 주민에게 개방하는 프로그램이다. 폭염이 점점 잦아지는 도시에서 운동장이 가장 가까운 거리의 녹지이자 시원한 쉼터로 활용되는 것이다. 이는 한 공간이 시간대와 이용자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크로노토피아’의 개념이 반영된 사례로 학생과 교사, 주민이 함께 어떤 운동장을 원하는지 의논하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건축가가 모형을 만드는 공동 디자인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해 운동장에는 놀이 공간, 야외 학습 공간, 휴식을 위한 쉼터, 식재 공간과 빗물 관리 시설 등이 조성되고 학생과 주민 모두를 위한 일상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변화는 골목 단위의 작은 공간에서부터 사람 중심의 환경을 확장시키며 새로운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준다. 2020년 시작된 ‘학교 가는 길’ 프로젝트는 현재 파리 전역 300곳 이상으로 확대됐으며, 이를 500곳까지 늘리는 방안이 2025년 3월, 시민 투표를 통과하면서 도시의 변화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자전거 인프라의 확대 역시 일상 전환의 핵심 축이다. 팬데믹 이동 제한 시기에 ‘코로나피스트(Coronapistes)’로 불린 임시 자전거 도로를 빠르게 확장한 뒤 이를 영구화하면서 시민의 이동 습관 자체를 바꿔놓았다. 일부 일방통행 도로에서는 자전거의 양방향 통행이 허용됐고, 노상 주차 공간을 자전거 거치대와 보행 공간으로 대체했다. 현재 파리의 자전거 도로는 약 1200km에 이르며, 도심 주차장 6만여 개가 축소된 자리에는 보행로와 녹지가 조성되고 있다. 도보와 자전거로 쉽게 닿을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우선시하는 사고 전환은 시민의 일상 생활 방식을 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 자전거로 이동하는 시민들의 일상. 15분 도시의 선도 모델로 꼽히는 파리는 자전거 도로 확충과 보행 친화 거리를 조성해 자동차 없이도 생활권 이동이 가능한 도시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다. 사진 제공: ⓒSeunghoon HAN / Chaire ETI

이동 수단별 15분 생활권 도달 범위를 비교한 아이소크론 지도다. 동일한 출발지를 기준으로 자동차(평균 시속 30km), 일반 자전거(평균 시속 15km), 전기 자전거(평균 시속 25km) 이용 시 접근 가능한 면적을 시각화했다. 전기 자전거의 도달 범위는 자동차에 근접할 만큼 넓게 나타나, 자동차 없이도 충분한 생활권 이동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미지 제공: Chaire ETI
동네 생활권에서 도시 전체로 확장되는 구조
15분 도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다중중심(Polycentric) 구조다. 특정 중심지나 단일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기능이 분산·연결되는 도시 구조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이동 거리를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간 불균형을 완화하는 형평성과 외부 충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회복탄력성을 동시에 높이는 전략이다. 이러한 구조는 서비스를 세 층위로 구분하는 ‘포트폴리오 오브 서비스(Portfolio of Services)’ 개념으로 설명된다. 매일 필요한 지역 서비스(빵집, 약국, 유치원), 간헐적으로 이용하는 중간 서비스(중형 의료시설 등), 도시 전체가 공유하는 중심 서비스(종합병원, 문화시설, 행정기관 등)로 나뉜다. 저밀도 지역이나 인구가 분산된 지방 도시에서는 모든 서비스를 15분 이내에 배치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세 층위를 어떻게 조합해 ‘30분 영토’ 안에서 작동하도록 설계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가 된다. 실제로 프랑스 광역 공동체 사례에서도, 인구 밀도가 낮을수록 이러한 층위별 분석이 보다 유효한 진단 도구로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단 이후의 실천 방안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커뮤니티 빌딩이다. 공동 주거와 공동 업무 공간, 지역 돌봄, 포용적 사회주택 등 공유 기반 생활 인프라를 확장해 공간과 시설을 함께 사용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둘째는 서비스의 복합 활용으로, 기존 시설을 다용도로 전환해 주거·일·상업·학교·식당이 한 건물이나 블록 안에 공존하도록 재구성하고 학교처럼 평일에만 사용되던 공간을 주말에는 지역 커뮤니티에 개방하는 방식이다. 셋째는 대안 이동수단으로의 전환이다. 신규 시설을 더 짓기보다 도보·자전거·공유·대중교통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기존 시설에 접근하는 경로 자체를 재설계한다. 넷째는 하이브리드화로 수업·업무·행정·의료·상거래 일부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방식으로 제공해 물리적 거리의 제약을 완화하는 전략이다. 이는 원격 거주자와 이동 약자를 연결하는 보완적 수단으로 작동한다.

파리 17구에 위치한 15분 도시 대표 모델인 ‘클리시-바티뇰’ 지구의 마틴 루터 킹 공원. 공공 임대주택과 사무실, 보육원, 대형 마트가 한데 모여있는 지역 내 자리한 이 공원은 산책로와 수변 공간이 어우러져 일상의 휴식과 이동을 동시에 지원한다. 사진 제공: ⓒSeunghoon HAN / Chaire ETI
다시 강조하자면, 중요한 것은 ‘가까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이 장거리 이동에 과하게 의존하지 않고도 일상에 필요한 기본 기능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본질이다. 결국 15분 도시는 어떤 기능이 부족한지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것에서 출발해 도시의 기능과 우선 순위를 정하는 시민 참여를 거쳐 지속적 정책과 거버넌스로 이어지는 생각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인식은 15분 도시가 ‘지속 가능 근접성(Sustainable Proximities)’이라는 보다 포괄적인 이름으로 확장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대도시의 틀을 벗어나 각 도시가 고유한 문화와 자원, 밀도에 맞게 근접성을 재해석할 수 있도록 프레임워크 자체를 유연하게 다시 구성하는 방향이다. 15분 도시의 핵심은 시민이 매일 걷는 길과 머무는 공간, 그 안에서 맺는 관계 속에서 조금씩 체감하며 축적되는 변화에 있다. 동네 단위에서 시작된 변화가 이웃한 생활권과 연결되고 나아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거리 공연, 수변 클라이밍, 야외 시장 등 일상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파리 도심. 문화, 여가, 생활 인프라를 생활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고 있다. 사진 출처: WRI Ross Center for Sustainable Cities
인터뷰이 : 소르본 대학 비즈니스 스쿨 기업가정신·지역·혁신 연구소 15분 도시 연구팀
파리 소르본 대학 비즈니스 스쿨 산하 연구 기관인 기업가정신·지역·혁신 연구소는 ‘15분 도시’와 ‘30분 영토’ 모델을 중심으로 도시와 지역 전환을 연구하는 학제 간 연구 조직이다. 특히 이번 기사에 등장한 사례와 중요한 첨언을 더해준 한승훈 도시 디자이너는 프랑스 그랑제꼴인 레콜 드 디자인 낭트 아틀랑티크(L'Ecole de design Nantes Atlantique)에서 도시재생과 시민참여디자인 연구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Chaire ETI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근접성(Proximities)’에 대한 사람 중심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이론의 시각화와 디자인싱킹을 기반으로 한 창의적 접근법 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글: 공공디자인 소식지 편집부







